이슈와 담론/정치(Politics)

민주주의와 중산층이라는 버팀목.

첼린저스 2016. 8. 30. 16:28

요즘 언론에서 중산층이라는 단어의 사용빈도가 늘어난 것을 볼 수 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서민이라는 용어가 대부분 쓰이던 추세랑 비교해보면 이미 하나의 사회적 계층으로서 인식되는것 같다. 


우리나라의 성공요소를 꼽자면, 


첫번째는 우리나라의 우익들이 찬양해 마지않는 개발독재 하에서의 공업 육성이 첫번째일 것이지만, 

두번째 요소로는 4.19혁명을 필두로한 민주주의 운동과 일제를 통한 시민사회의 경험, 

세번째 요소로는 복지를 필두로 한 권위주의 정권의 복지 및 진보적 경제 정책이라 볼수 있다. 


특히 산업화 이외 두가지의 요소는 우리나라의 민주화와 시민의식의 상승을 이끌어내었다고 볼 수 있다. 


단순히 옳은 사상을 가지고 바른 교육을 받은 사람들만이 중산층이라고 볼 수는 없다. 

반드시 이를 뒷바침하는 경제력이 존재하여야만 중산층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중산층이란?


서구권에서 중산층이라고 하면 보통 중산층 특유의 사고방식을 가진 개인 혹은 집단을 의미한다. 실질적인 소득 수준과는 크게 관계가 없다는 것. 특정 계급은 고유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그러한 이해 관계는 곧 이를 정치화 할 수 있는 문화적인 배경을 가진다. 실질적으로 중산층을 가르는 기준은 없다.


현재 대한민국 정부는 현재 공식적으로 중산층 개념에 대해 정의를 내리지 않고 있지만,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의 중산층 개념을 원용하고 있다. OECD는 중산층을 '중위소득의 50~150%'에 해당하는 계층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경제적 중산층으로서, 중산층이 세계 역사와 민주주의에 기여하는 현상을 뒷바침하기 어렵다. 한국이 그 반례의 산 증인이기도 하고. 


그러니, 이 글에서 말하는 중산층은 자의식을 가지고 있고, 경제적 능력을 어느정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정의하며, 


더 나아가, 경제적 중산층교육적 중산층을 나누려고 한다. 


경제적인 중산층은 OECD의 정의대로 '중위소득의 50~150%'에 해당하는 계층,

교육적 중산층은 고졸 학력 이상의 자신이 직접적으로 자유로운 사고와 자신만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고 의식하는 사람들을 정의한다. 


역사가 증언하는 중산층


역사는 중산층이 뒷바침이 되는 혁명과 개혁은 성공한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사회시간에 배우는 젠트리와 요먼이 그 예이고, 프랑스의 부르주아 계급이 바로 그 예이다. 이들은 귀족과 성직자와는 다른 중산 계급으로서, 지주들과 학자들, 소규모 자본가들, 변호사들, 법관들같은 의식주에 구애받지 않는 "깨인 사람들" 이었다. 이들은 효과적으로 혁명의 재정적, 사상적 뒷바침이 되어 주었으며, 프랑스와 같은 강력한 전제 권력에는 폭력을, 영국과 같은 봉건적 연합 권력에게는 정권교체를 선물해주었다. 


경제적 중산층은 주로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역할을, 

교육적 중산층은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에서 큰 역할을 한다. 


단순히 엘리트층 위주로 개발되던 프로이센과 스페인은 쉽게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경향을 보인다. 같은 시기 민주주의를 유지하던 스위스하고는 중산층은 혁명의 성공은 물론, 그걸 여유롭게 유지하던 것과 반대로 말이다. 


경제적 중산층은 전후 영국과 프랑스가 재건되고, 서독이 민주주의가 어렵지 않게 정착되고, 일본이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특히 서독과 일본은 민주주의의 경험이 극히 짧은 채인데도 불구하고, 경제적 호황 아래에서 민주주의가 어렵지 않게 정착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예를 봤을때 경제적 중산층은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 혁명은 교육적 중산층과 경제적 중산층이 콜라보를 이룬 중산층 혁명이었다. 미국의 경우에는, 계몽사상가들의 피난처역할을 하는 동시에, 자영농과 기업들, 그리고 소지주들로 뒷바침되는 거대한 혁명전파층이 있었고, 이는 미국 독립 당시 여론이 33%나 혁명에 우호적이었고 그중에 13%가 열혈히 혁명에 참여했다는 학자들의 예상이 이를 뒷바침하고 있다. 대부분을 차지하던 부동층을 제외하고 적극적인 참여층이 13%, 우호적인 사람이 전체 인구의 25-30%가 된다는 것은 삼천만 인구중에 46만명에서 200만명이 참여한 3.1운동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좋은 예로 우리나라도 있다. 우리나라는 4.19 혁명으로, 어려운 시절에도 "교육적 중산층"이 주로 존재했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지지를 받아 이승만 정권 타도에 성공하였고, 그 후 한국 사람들은 4공이 쌓은 산업육성과 5공의 과감한 분배정책에 힘입어 부마항쟁과 6월 항쟁등으로 민주주의의 쟁취에 성공하였다.  4.19혁명이 학생과 지식인들, 즉 "교육적 중산층"에 주도된 과도기적 혁명이라면, 6월 항쟁과 같은 민주화 운동은 경제 호황 아래에서 교육적 중산층과 경제적 중산층이 함께 이루고 이를 유지시킨 케이스라고 봐도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IMF라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경제적 중산층과 교육적 중산층이 괴리되어 버린것. 



손과 발이 묶인 우리나라의 중산층 "서민"


그러나, 우리나라의 중산층은 과거 5공 시절에 행해졌던 분배정책이 끝나고, 우리나라가 점점 중진국 함정에 걸려들면서 성장세가 느려지며 발생한다. 바로 IMF사태가 터진 것이다. 이것으로 우리 시민사회는 큰 타격을 입었다. 


한국에서는 중산층만이 가지는 특유의 자의식을 다른 사람 앞에서 공개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졌는데, 이는 중산층 의식이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외환위기를 겪었던 것을 그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중산층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던 사람들이 그렇게 되지 못하면서 중산층의 계급 의식을 다른 사람 앞에서 보이는 것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공분을 살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우리나라는 급격한 산업화, 그리고 정보화로 인해, 1930년대, 즉 농경 사회에서 태어난 사람과, 산업화의 중심에서 중-장년층을 보낸 사람들, 그리고 86년 이후에 태어난 민주화 이후에 태어난 세대, 즉 정보화 세대가 윗세대에 밀리는 상황이다. 1920년대부터 산업화와 공교육이 자리잡아 중산층내 세대갈등이 약한 서구 국가와는 달리 말이다.  


사회 전반에서 중산층이 주로 지지하고 이야기하는 담론들이 주목을 받지 않고, 중산층 자신들이 이에 대해 쉬쉬하면서 자신들의 무대를 통신 기술 발달의 영향을 이용해 인터넷과 게임등 뒤로 옮겨 중산층이 주도하는 시민 의식이 공론화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보통 쓰는 단어가 "서민"이다 "경제적 중산층"인데 그걸 다른 사람 앞에서 드러내고 싶지도 않고, 막상 따지고 들어가면 "교육적 중산층"도 얼마 없는. 그런 애매모호한 한국의 상황을 증언하는 단어인 것이다.


우리는 배가 고프다. 


특히 이런 상황에서 교육적 중산층을 창출해내야 하는 정부의 역할은 경제적 중산층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무력해진다. 애초에 이 두 그룹(교육적,경제적)에 둘다 속하는 중산층이 작은 상황에서, 경제적 중산층까지 무너지며 한국의 미래는 낙관적으로 볼 수는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특히 진보적인 스탠스와 안정적인 교육을 받았던 86년 이후의 세대가 빈민층으로 간주되는 것은 결국 중산층의 붕괴와 극단적 이념대립, 아울러 민주주의의 후퇴를 가져올수도 있다. 


중산층은 보통 일정 수준 이상의 교양을 쌓게 되는데, 그만한 시간과 수고를 들이는 것은 그게 본인이 의도해서 그렇게 된 건 아니라고 해도 삶에 대한 적잖은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이런 "교육적 중산층"에 속하지만,  경제적 중산층이 되지 못한 중산층 수준의 개인들의 존재가 중산층 전체의 행복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그렇게 풀리는 자본 바깥에 있는 개인들의 숫자가 지나치게 많으면 엄청난 사회적 문제가 생긴다. 세계 대공황기에 자살율이 급등하거나 범죄율이 상승하는 것도 그런 차원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단순히 "헬조선"이라는 유행어를 "국론 분열"로서 봐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러한 유행어가 청년 사이에 유행하고 있다는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는 민주주의의 유지와 민주주의가 가져오는 사회적 이득을 고려해봤을때, 우리나라는 취약한 기반을 보완하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무너트리는 것이다. 


상황을 비관적으로만 볼것은 아니지만, 이 추세가 계속된다면 우리나라의 미래는 상당히 낙관으로만 차있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