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와 담론/정치(Politics)

왜 우리나라는 행운의 나라인가.

첼린저스 2015. 2. 27. 17:01

모 사람들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근면하고 순수한 민족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강국을 이루게 되었다는 헛소리를 한다. 물론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수긍이 가겠지만 나는 우리나라가 이러한 선진적인 국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다른 곳에 있다고 확신했다. 물론 교육열과 국민성, 그리고 구 세대들의 노력이 분명 중요한 요소이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이 과연 개발도상국 또는 후발 국가가 선진 국가가 될수 있는 결정적인 요소인지는 회의가 드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이든 아랍이든, 아니면 동남아 국가들이든 사람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나, 개인주의, 또는 자연권의 개념, 정교분리 같은 서구(?)의 개념이 전세계에서 공격받고 있는 상황에도 우리나라는 성공적이게 민주주의나 개인주의가 미숙하긴 하지만 빠르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민주주의나 개인주의같은 가치관이 과연 교육열과 부지런한 국민성의 결과라고 볼수는 없다. 중국이 개발독재로 부강해져도 그 인민들에게 돌아오는 혜택은 거의 없다시피 하고, 빈부격차가 우리나라와는 비교할수 없이 벌어지는 것도, 국민성과 교육열과는 별개로 진행되는 것이다. 즉 나라의 부강과 인민의 안정된 삶은 별개이며, 개인주의와 민주주의의 성공적인 정착도 교육열과 국민성과는 많은 접점이 없다. 


즉 우리나라의 산업화는 대단한 것이지만 제 3국들이 민주주의와 개인주의의 운영에 큰 차질을 빚고 있는 것으로 볼때, 우리나라가 이러한 사상적 급변을 맞이하게 된것은, 즉 이러한 사상의 흐름 변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것은 엄연히 다르게 


본인은 우리나라가 빠르게 서구화되었던 이유는 크게 두가지로 정리할수 있겠다


1) 한글의 보급

2) 6.25 동란으로 인한 완벽한 파괴


한글의 보급

한글은 언문으로 불리면서, 일반 백성의 언어 활동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이씨 조선 치하 아래에서 지식과 경전을 비롯한 모든 것은 한문으로 쓰여진 것이었고 그것은 양반들과 귀족들의 독점물이었다. 백성들은 그런것을 배우기가 쉽지 않았고, 양반 역시 "예는 서민에게 미치지 않고 형은 양반에게 미치지 않는다" 라는 의식 아래에서 그들에게 경전을 읽거나 이치를 깨우치기를 강요하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가장 중요한 저작물도 충효를 강조한 것이거나(즉 충을 강조하기 위해 효를 같다붙인) 농사직설등의 실생활에 필요한 것들만 제공되었다. 물론 평민들도 향교에 들어가 나름대로의 지식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으나 교육받은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한글의 보급은 19세기에 들어서 거대한 변화를 만들어낸다. 한글은 우리나라가 중국 문화권으로부터 독립하는데 있어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봉건 왕조 치하 아래에서의 지식 활동은 모두 한문으로 이루어졌다. 즉 19세기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한문으로 글을 읽었지 결코 국문으로 책을 읽지 않았다. 그러나, 근대 사회로 들어서면서 서구의 저작물들이 일본이나 중국을 통해, 그리고 유학을 다녀온 신지식인들에 의해 언문으로 번역되기 시작하고, 신여성과 지식인들이 한자를 떠나 한글로 된 서구의 저작물들을 접하면서, 한글로된 신문으로 소식을 접하면서 한문을 읽을 필요성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하였다.(왜냐하면 그러한 신문들과 계몽 잡지들은 백성들, 즉 민중들을 타겟으로 했지 결코 유림들을 타겠으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교 경전을 비롯한 한자 번역물들의 한글 번역은 굼뜨기 그지 없었다 이유인즉, 이것 자체가 그 당시로서는 우리 문화에 녹아들고 있었고 친숙했었고, 일반 민중과도 공유되지 않은 유림이라는 기득권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이다. 즉 유림들이 한자와 자신의 경전을 끌어안고 옛 세월을 읇는 동안, 새로운 사상은 한글이라는 기류를 타고 국민에게로 퍼지게 된 것이었다.  


우리나라와 중국은 예로부터 발음만 달랐다 뿐이지 서로 한문을 썼기 때문에, 지역상의 방언의 차이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조청 또는 조명 양국은 학문의 교류에 서로 불편함이 없었다. 양명학이랑 고증학책들이 번역 없이 읽혀저서 하나의 실학이라는 분류를 창설해낸것도 조청 양국이 학문적, 문화적 교류가 원활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세에 들어 서로 언어가 달라지고, 필문이 달라지면서 중국과 우리나라는 서로 학문적으로 단절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조선시대처럼 중국의 책이 우리나라에 쉽게 퍼지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었다. (또한 중국의 구 학문이 쇠퇴하던 시기었으니 서구 도서에 비해 중국의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것이 적어졌다) 


즉 우리나라는 한문을 완벽히 버리게 되므로서 (비록 21세기까지 국한문혼용을 유지했지만), 중국은 중국 내부에서 현대 중국어로 스스로의 언어를 발전시키면서 한중 양국은 언어적으로도 학문적으로도 갈라지게 된 것이다. 비록 아시아에 존재했지만 한국은 서서히 서구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6.25 동란

6.25는 우리 한국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첫째로 전통적 토박이들과, 봉건 향리들이 사라졌다. 조선 왕조는 한반도 최초로 중앙 집권을 이루었던 왕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조부터 이어온 뿌리깊은 향리 가문들과 토박이들은 개혁을 방해하는 첫번째 세력이었다. 6.25전쟁은 비록 참혹했으나, 인구의 대이동을 이루어내고 향리들이 전쟁통에 죽거나 토지를 몰수당하면서 무력으로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일제를 거치면서 유림이 무너지고 있는 추세에 6.25동란은 유림의 몰락의 결정적인 쐐기를 박는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집성촌들이 대거 사라졌으며, 피난민등으로 인해 도시가 생기고, 신분의 잔재가 이 시기를 기점으로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둘째로 한국 전쟁에 의해 지주와 자본가들이 사라졌다. 즉 지주와 자본가들은 일제의 보호 아래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하였고 광복 후에도 남북 양국에 존재하였다. 6.25동란은 지주 계급을 완전히 박살냈으며, 산업기반을 파괴함으로서 일제 치하에서 있던 지주와 자본가들은 빠른 속도로 몰락할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전쟁 이후 실시한 토지개혁을 성공적으로 실시하게 만들었고 산업기반을 국가가 주도하게 되는 결정적인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이는 개발독재 시대를 우리나라가 맞이하게 되므로서 더욱 극대화되었고 이것은 빠른 산업화와 정경일치 사회로 이어진다. 


셋째로 일제로 인한 1차 파괴를 비롯하여 전통 문화와 생활 방식이 훼손되었다. 일제로 인한 문화 파괴로 시작된 전통문화 파괴는 6.25라는 어렵고 잔인한 시기를 거치면서 빠르게 소멸했고 그 결과 빠르게 개신교를 앞세운 서구적 가치관이 정착하는데 큰 영향력을 끼쳤다. 또한 개신교계가 가져온 하나의 청교 윤리 역시 자본주의의 성공적 정착에도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개신교를 앞세운 자유주의 사상은 이 시기 이후에도 크게 퍼져, 서구 문물을 우리나라에 계속 접하게 해주는 창구 역할을 했다. 비록 그 역할이 지금은 퇴색되었을지 몰라도, 그 당시에는 사회 안정을 비롯하여 새로운 사상의 전파가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교회였다. 즉 부서진 전통 문화 자리에 서구적 가치관이 초등학교를 비롯한 공통 교육과 교회를 통한 자유주의 사상의 유입을 타고 전통 사고관을 빠르게 대체함으로서, 4.19혁명을 비롯한 민주화에 결정적 역할을 해냈다고 봐도 될 것이다. 즉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나라는 개발독재 하에서도 민주화가 불타오를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즉 우리나라는 6.25를 통한 완벽한 파괴로 잿더미속에서 새로운 세상에 적응할 수 있었다. 남미 국가나 여러 국가들이 지주와 자본가들의 반발, 전통의 반발로 인하여 개혁에 어려운 상황을 겪고 있는 것을 볼때 우리나라의 빠른 산업화와 민주화에 6.25동란이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결론

우리나라는 이러한 것들을 종합하여 볼때, 교육열과, 적은 식민생활을 통한 나름대로의 부지런함, 전통의 부재, 중국으로부터의 학문적 단절, 그리고 문화의 파괴로 인한 서구 문명세계로서의 편입은 우리 나라가 산업화 발전을 이루고 민주화와 서구화가 이루어지는데 톡톡히 공헌하였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점에서 우리나라는 행운의 나라이며, 우리나라가 근면한것도 일부 요인이기도 하지만, 운이 받쳐준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