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사회/국제관계와 정부체제

이슬람의 일반화는 필요불가결하다.

첼린저스 2016. 7. 30. 14:29

최근 일련에 벌어진 테러들과 무슬림이 저지르는 사회 문제들이 연속적으로 언론에 보도되면서, 유럽에서는 이민 정책과 다문화 정책에 대한 고찰이 다시 한번 시작되려 하고 있다. 미디어를 타고 오는 IS같은 이슬람 극단 무장 단체들의 소식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슬람에 대한 경각심을 충분히 심어주었고, 오늘날 서구 국가들이 그러하다시피, 우리 나라도 이슬람에 대한 비판과 일반화에 대한 목소리가 서서히 증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 나라 뿐만이 아닌 서구에서도 1980년대 이후로 이슬람을 혐오하는 것을 공공하게 드러내는 기독교계의 반동으로서, 무슬림(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에 대한 차별 금지와 문화 상대주의를 내세워, 그들의 잘못을 정당화하거나 침묵해서 덮어주었고, 그들을 마냥 약자와 소수자로 취급하는등의 실수를 저질렀다. 관용을 베풀어서는 안되는 범죄조차도 문화의 영역으로 몰이해하여 이해해 주었으며, 이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존중은 이슬람이 자신의 사회 내에서 이질적인 "작은 사회"를 만드는 것을 용납해주었다. 


그들 개개인을 이슬람을 믿는다고 해서 차별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건 빼도박도 못할 "일반화의 오류"이다. 그러나 유럽 사회가 겪은 것들이 우리나라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으니만큼, 이슬람에 대한 일반화가 필요하며, 일반화의 필요성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서 출발한다.


이슬람은 무엇이기에 신자들이 현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며, 적응하지 못한 자들중 극단화되는 사람들이 많은가? 


단순한 문화상대주의적 관점에서 볼 것이 아니라, 인권과 보편 교육, 근대적 가치를 기준 삼아 이슬람에 대한 일반화가 필요하며, 일반화를 통해 대체적인 이슬람에 대한 비판과, 정부의 집중적인 감시, 교육과 처벌을 앞세운 강력한 동화 정책을 펼쳐야 한다. 



무슬림을 따돌리는 사회, 사회를 따돌리는 무슬림.


또한 이슬람은 진화론과, 성 정체성, 자유주의같은 현대 사회의 기본적 가치를 부정하고, 현대 가치와의 타협을 거부하는 경향이 누구보다도 많다. 이러한 이유는 기독교가 근 500년간 계몽주의자와 이성의 돌팔매를 맞으며 수많은 공의회와 회의를 통해 교리와 호교론을 정립한것과 달리, 이슬람은 21세기 들어서도 정교분리가 되지 않은 사회에서 널리 퍼져 있으며, 그러한 사회의 문화를 기반으로 정립된 시대착오적 교리들은 현대 사회의 가치와 갈등을 빛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이들의 사회는 정교분리가 되지 않거나, 허울뿐인 경우가 많아 역시 서구에서 활동하는 무슬림 역시 정교분리를 "이슬람 탄압"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들이 살던 사회는 정치가 곧 이슬람이고 이슬람이 곧 정치이기 때문이다. 


무슬림 이민 사회가 비교적 세속화가 되지 않은 이유는, 현대 사회의 세속화 폭풍 속에서, 이슬람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이슬람의 커뮤니티는 독자적인 교육 시설과 종교기관을 중심으로 한 소규모 공동체를 조직하여 이슬람 문화와 언어를 이민 세대에게 전수했다. 게다가 주류 사회에서는 주류 사회의 일원이기를 거부하며, 현대 사회의 가치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을 차별하거나 불이익을 주었다. 다시 말해 무슬림 이민사회가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주류 사회의 차별과, 차별에 대항한 종교의 광신으로 인한 동화의 거부에 존재한다.


이는 단순히 서구의 문제만은 아니다 교육 문제를 예를 들자면,  2003년 한국에 귀화한 탈레반이었던 무함마드 아심은 한국에 이슬람 종교 학교를 세우고 파키스탄에서 이슬람 학자까지 데려왔으나 교육청에서 대안학교 인가를 내주지 않아 2007년 말에 문을 닫아야 한다는 소식을 알렸다. 무함마드 아심의 장남 알리는 2003년 당시 16살이었고 차남 모하스는 14살이었는데 늦게 입학한 탓에 각각 중학교 1학년과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하지만 두 아이는 교과를 따라가지 못해서 매일 숙제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쿠란 공부만 챙겼으며 집에 있는 책이라고는 쿠란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뉴스를 보고 많은 네티즌들은 현실적으로 현대 사회에서 아동을 방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라며 무함마드 아심을 비판했다. 학력 사회 운운하며 이들을 두둔하는 주장이 있으나, 애시당초 한국이든 해외든 세속화/근대화된 중진국~선진국 중에 기초적인 교육과정도 이수하기를 거부하고 이슬람 쿠란 따위나 공부했을 때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굳이 한국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 세계 세속 국가 어디서든 이슬람 교육만 받고 정작 현대 사회에 필요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란다면 결국 이들은 사회 하층민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하나 더 예를 들어보자면, 지난 번 뮌헨에서의 청소년 총격 사건이 있는데, 이것은 주류 사회가 어떻게 동화를 원하는 무슬림을 밀어내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란계의 이민 2세 청소년 다비트 존볼리는 브레이빅 류의 우익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어서 1년간 범행을 준비했다. 그는 두 명의 학우들에 의해서 무슬림으로 놀림받으며 혹은 독일인이 아니라고 따돌림을 당해왔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외국인 대다수에 대한 증오를 품었다고. 이란인과 독일인은 같은 아리아인이라는 생각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 했다고 한다. 우익 정당인 AfD를 지지했으며, 자신의 생일이 히틀러의 생일과 같다는 것을 상으로 생각했다.


자신이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극단적인 사상을 지지했고, 결국 이것이 자신이 이민자인데도 불구하고 외국인 대다수에 대한 증오를 품고 말았다는 슬픈 이야기이다.


이 두가지의 예는 무슬림이 스스로 자신을 결박하고 현대 사회의 가치관과 교육을 거부하는지, 그리고 주류 사회는 어떻게 무슬림의 동화를 방해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즉 필자는, 무슬림이 이민자로서 주류 사회에 진입하기 힘든 이유는 이슬람이라는 이념과 주류 사회가 콜라보를 이루어 무슬림의 사회 동화를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한쪽에만 면죄부를 주고 한쪽에는 책임을 몰아버릴수 있는 경우가 아니라는 것. 이슬람이라는 개념을 일반화해서 이슬람이라는 이념의 이질성과 비문명성, 그리고 타협을 거부하는 근본주의적 마인드를 비판할 필요가 있으며, 그와 함께 이슬람에 대한 차별과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 역시 강하게 처벌하고 교육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무슬림이 지탱하는 이슬람, 이슬람이 정당화해주는 무슬림. 


오늘날 중동의 비문명성에 대해서, 낮은 교육 수준과 근대화 훈련의 부족을 원인으로 돌리며, 이슬람에 원죄부를 주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들에게 묻고 싶다. 그들이 현대 사회의 가치관을 가르치는 교육을 거부하고, 근대화를 악으로 생각하는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인가? 바로 이슬람이다.


이슬람을 올바른 방향으로 개혁하고자 하는 양심있는 무슬림도 있다고 반문할수도 있다. 필자는 그들에게도 묻고 싶다. 그들이 현 이슬람을 개혁하고자 하는데, 가장 방해되는 세력은 누구인가? 바로 다수의 무슬림들이다. 


정리하자면, 오늘날 중동의 문제점은 무슬림의 전근대성과 이슬람의 콜라보레이션이라고 볼 수 있다. 어느 하나만 개혁한다고 해결할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이는 18세기 유럽이 직면하였던 문제이며, 유럽은 종교개혁을 통한 종교권위의 분쇄, 그리고 교육을 통한 사회 구성원들의 교육을 통해 오늘날의 진보를 이룰 수 있었다.


서구 제국(諸國) 들이 중동을 침략하고, 식민지화하기 시작함으로서 시작된 기독교의 제국주의적 선교와 급격한 서구화는 근 2세기 동안 아랍 민족주의자와 종교적 극단주의를 낳았으며, 와하비즘을 위시한 사우디 아라비아를 비롯해, 이슬람 원리주의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1990년대 소련과 미국이 싸우던 틈을 타 민족주의 운동으로 가속화 되었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17세기 이전에도 존재하였던 이슬람 신정 국가들은 2000년대 들어와서도 맹위를 떨치고 있다. 오늘날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이슬람 국가들은 법적으로도 개종을 금지하며, 터키같은 세속 국가도 이슬람을 배교하는 즉시 엄청난 사회적 불이익을 감소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슬람은 무슬림의 제정일치 사회 지배 체제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으며, 이슬람은 서구와 근대화에 대한 반감과 열등감에 젖은 무슬림의 구심점이 되어 준다. 


즉 무슬림의 작은 사회를 깨트리기 위해서는 이슬람에 대한 일반화가 필요하며, 이를 기반으로 이슬람의 문제점들을 비판하고, 무슬림을 교육하고, 무슬림에게 현대의 인권 기준과 현대의 가치를 따르지 않으면 처벌받는다는 것을 각인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무슬림에 대한 일방적인 혐오와, 무슬림에 대한 비판은 틀리다.


물론 그렇다고 무슬림 사회를 악으로 묘사하거나, 이슬람의 신을 사탄의 계략이라 매도하는 무슬림 혐오자들의 주장은 별로 신빙성이 없다지만, 필자는 무슬림의 신을 절대 악하다고 묘사하거나, 그들의 선지자를 모욕하지 않는다. 다만 신이 선하다고 해서 그 종단이 선하다는 보장이 대체 어디 존재하는지는 모르겠다. 즉 신 자체의 성스러움과 그들을 따르는 자들을 구분해야만 한다. 오늘 필자가 이 글에서 이슬람을 욕한다고 해서 그들이 믿는 선지자나 하나님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극단주의에 대한 정당한 비판과 이슬람에 대한 풍자조차도 신성모독, 이슬람포비아로 치부하거나 폭력적으로 거부하며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 또한 이슬람권 전체의 심각한 문제이기도 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중국의 언론 통제를 비판할 때 중국의 역사적, 종교적, 정치적 배경을 모두 고려해서 비판하는 사람은 없다. 이런 식으로 모든 배경을 고려하면 결국 세상의 대다수의 악들이 정당화 돼서 아무것도 비판하지 못하게 된다는 점은 모두가 상식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개신교의 "일부" 드립이 왜 비판받는지 알고 있다면 무슬림들이 "일부 무슬림은 공격적이지만 또 아닌 이슬람들도 많다" 식의 핑계는 별로 설득력이 있는 논지가 아니다. 


무슬림 중에는 선량한 사람도 많고 그들이 서구 제국주의 아래에서 고통받은 역사가 있던 것은 사실이나, 그런 식으로 주장하고 나서면 똑같이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서 고통받고도 이슬람처럼 광신적 극단주의에 치우치지 않은 힌두교. 불교, 토착종교들은 모순이 된다. 이건 결국 이슬람이 비이슬람에 비해서 폭력적이고 광신적이다라는 자폭성 결론밖에 못내는 변명이다. 


결론적으로, 현대 사회는 이슬람에 대한 일반화가 필요하며, 일반화된 이슬람에 대해서 강력한 비판을 가할 필요가 있다. 


무슬림은 절대 소수자가 아니다.


서구 사회에 사는 무슬림들은 자신이 소수자라는 생각에, 자신의 종교와 관습이 무조건 보호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수 존재한다. 이는 "이슬람 극단주의 성향에 대한 비판=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종차별이 우려된다" 같은 식의 고정관념이 팽배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이슬람을 감싸는 그들의 주장은 "이슬람"이 복잡한 면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악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현대 이슬람은 문화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특징이나, 철학적, 정치 이데올로기적, 정치 제도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즉 이러한 면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무슬림은 절대 소수가 아니며, 오히려 무슬림들이 기독교나 타 종교보다 여성인권과 성 소수자에 대한 열악한 인권관념을 가지고 있는 현 상황에서는, 젠더 이슈에 관심을 가진 사람의 눈에는 다수파의 편에 서있는 사람들이다. 단순히 수가 소수라고 해서 무조건 존중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것. 


기독교나 타종교들이 '나름' 스스로의 문제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슬람의 만행에 대한 면죄부는 결코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슬람을 옹호하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글을 맺으면서 정리하자면, 오늘날 이슬람과 무슬림을 정책의 대상으로서 다룰 때에는 단순히 이슬람을 문화상대주의적인 시각만 가지고 접근하기 보단, 어느정도의 일반화를 통해 비판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또한 무슬림 역시도 교육의 대상으로 삼아 포용하면서도 그들이 저지르는 시대착오적 범죄나 인권 경시 사상등은 철저히 교육과 처벌을 통해 동화를 권장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근데 그거 알아? 서양의 가치가 다르기만 한게 아니라 더 나은거란걸. (중략) 법치주의는 우월해. 독재정치나 신정정치보단. 

성의 평등은 우월해, 소수자의 보호도 우월해, 언론의 자유도 우월해, 자유 선거도 우월해, 


-빌 마허-


빌 마허의 명언과 함께 글을 마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