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이미 초기 식민지부터 독자적인 행정부와 독자적인 입법부를 거느리고, 자치 기관 하에 생활하고 있었다. <국부론>에서 애덤 스미스는 영국의 식민지 정책이 다른 유럽 국가보다 덜 독점적이고, 덜 전제적이라고 영국의 식민지 정책을 바람직하다고 칭찬하고 있을 정도로 미국의 초기 식민지 사회는 우리가 생각하던 식민지랑은 다를 정도로 본국에게서 자유로웠다.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 정책은 개개인의 능력을 자극함으로서, 농장주와 전제정치로 운영되던 타 유럽 식민지보다 더 탄탄한 중산층을 보유할 수 있었고, 결국 이는 교육되고, 탄탄한 지식층으로 이어지면서 "미국 혁명"이라는 결과를 낳게 된다. 지주들과 크레올이 중심이 된 남미 혁명과 다르게, 미국의 혁명은 "산업화되는 사회에 존재하는 중산층" 중심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미국 혁명의 요인은 다음과 같다
1. 프렌치-인디언 전쟁에서 막대한 전비를 쓴 영국은 세금충당과 재정악화를 피하기 위해 영국의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려 했다. 다음과 같은 법은 영국의
(1) 설탕 조례(1764) - 설탕에 관세를 붙이는 법
(2) 인지세법(1766) - 물건을 사고팔때 반드시 세금을 냈다는 종이를 붙여야만 팔수 있게 하는 법
(3) 차 조례(tea act/1766) - 동인도 회사가 파산에 몰리니 직접 미국에 싸게 내다팔수 있게 하는법
(4) 타운센드 법 (1767) - 미국 수입품의 세금 물리는 법
(5) 참을 수 없는 법률 (Intolerable acts, Coercive acts) - 영국의 북미 식민지에 대해 1774년에 영국 의회를 통과한 일련의 법률을 부르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법들은 13개 식민지의 분노와 극심한 저항을 자극했으며, 결국 미국의 독립으로 발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2. 그와 반대로, 프렌치-인디언 전쟁 이후에 아메리카 원주민과, 스페인, 프랑스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난 식민지인들은 영국의 보호를 필요로하지 않게 되었다
3. 강력한 중산층과 지식층의 망명과, 산업화로 인해 정보 교환과 인식이 트인 사람들이 많았다. 한마디로 계몽사상이 널리 퍼져있었고, 영국이라는 압제자를 만나, 계몽주의를 근거로 똘똘 뭉칠 수 있게 되었다.
대륙 의회 vs 영국 의회
1774년 9월, 영국이 저지른 보스턴 학살(Boston Massacre) 반기를 들고 일어서는 사람들과 각 주의 명사들이 모여 제 1차 대륙 의회(First continental congress)를 개최한다. 조지 3세는 미국인이 자신의 의회가 아닌, "식민지의 통합 의회"를 구성했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일어난 전투 이후에 양 측이 전쟁속으로 들어갔는데도, 이 당시에는 사람들이 미국이 독립한다는 사실보다는 대륙의회와 영국 의회의 기 싸움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참을수 없는 법률들"에 반대하여 영국 의회를 타도하자는 모임과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싸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 사람의 등장으로 혁명은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다. 토마스 페인이 1775년에 출간한 "상식"(Common Sense) 이라는 책은 몇 주만에 15만부를 팔아치울 정도로 대 인기를 끌었는데, 이는 왕정을 부정하고 공화국과 미국의 정신을 강조한 책이었다. 이는 미국 혁명을 180도 바꾸어놓게 된다.
미국 혁명의 전환점- "상식"과 "미국 독립 선언"
미국의 독립 선언은 다 알겠지만, 제퍼슨이 작성하고, 영국에서부터 독립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우선 제퍼슨은 로크의 논지를 주로 인용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같은 부분이라던가, 미국 독립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사회 계약"을 어긴 조지 3세를 비난한다던가 하는 내용 말이다.
다만 주의해야 할점은 로크는 "자유, 생명, 재산"의 보호를 주장했다면 미국 독립 선언에는 "자유와 생명,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했다는 점이다. 이어서, 건국의 아버지들은 로크의 인권 개념의 모호함을 이용하여, 제퍼슨의 반노예제 주장을 논파하기에 이르렀다. 로크는 정부에 관한 두번째 논문( A Second Treatise on Government)에서, 모든 인간은 동등하게 태어났어도, 나이, 신체, 경륜, 출생, 특권등에 의해서 그 계급이 갈라질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 부분에서 미국 건국의 아버지는 제퍼슨의 반 노예제 주장은 로크의 사상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결국 반 노예제 주장은 삭제되었다. (물론 표면상으로는 이렇겠지만, 노예제 논쟁의 배후에는 다 이해관계가 서려 있었다)
미국 혁명의 어두운 점들
미국 혁명이 진행되면서 더욱더 어두워진 부분도 있었다. 하나는 영국이라는 시장을 잃으면서 급속히 몰락하고 있는 농민층과 중산층, 그리고 사회적 약자 집단, 미국 내 흑인종들, 북미 원주민들과 여성들의 인권은 미국 혁명이라는 폭풍을 만나 더욱 벼랑끝까지 치달았다.
1) 흑인 집단은, 미국 혁명에서 공헌을 하였으며, 그 덕으로 많은 흑인들이 자유가 될 수 있었다. 특히 매릴랜드에서 노예제가 불법화되었으며, 미국 건국 이후에 전체 흑인 인구중 5%가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영국 식민지 시절보다 더 진보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제적인 어려움과 사회적 차별은 많았고, 선거권도 없었으며, 뉴저지 같은 경우에는 1786년에 자유 흑인들의 뉴저지 입국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이는 북부 주들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이후 20년동안 많은 북동부 주들이 자유 흑인들의 참정권을 부인하는 법을 연이어 통과시켰다. 1852년에 더글라스 의원은 "7월 4일은 네 것이야, 내 것이 아니고. 너는 기뻐해라, 나는 애도해야만 한다"(This Fourth of July is yours, not mine. You may rejoice, I must mourn" 라는 명문구를 통해 미국 혁명이 흑인들을 법적으로 차별하기 시작한 도화선임을 지적하기도 했다
2) 미국 원주민의 경우에는 영국이 없어지면서 수난이 시작된 경우이다. 영국 정부는 미국인들의 서부 진출과 원주민과의 충돌을 자제시켰는데, 영국이 물러나자마자 미국은 유례없는 팽창을 했고, 모두 알다시피 이들은 흑인처럼 시민권을 얻지 못한채 인디언 보호구역, 자치구에 사실상 감금되거나 학살당해야만 했다.
3) 여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여성의 경우에는 "자유의 딸들" (Daughter of Freedom)단의 활동과 가정 내에서의 차 불매운동등, 독립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주들이 여성의 권리를 제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들을 물건으로 간주하거나, 재산을 제한하거나 하는 등의 법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That all man are created be equal (모든 man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다행이도 그 당시도 저 문구를 man(남성)을 "남성"이라고 해석하지 않고 "사람(Human being)" 이라고 해석하고 있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문구를 곡해해서 여성을 남성의 아래로 보거나, 참정권을 주지 않는등의 차별정책은 식민지 이후부터 더 노골적으로 시행될 정도였다.
미국 혁명은 이렇게 여러가지 면을 가지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한국 교과서들이 미국 혁명을 공부하면서 다루지 않는 시각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써본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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