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사회/인류의 역사

보수적인 문명, 이집트 겉핥기

첼린저스 2016. 8. 30. 05:13

이집트는 거슬러 올라가면 기원전 6100년정도에 형성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세계 4대 문명에서도 두 번째로 오래된 문명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조금 더 오래된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다만, 외적의 침입이 없는 사막 한가운데, 즉 고립된 지역에 존재한 이집트 문명은, 아카드 왕국의 사르곤 왕보다 더 일찍 통일 국가를 이룰 수 있었다. 문명에서 강은 통일을 요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된다, 물길을 두고 수많은 도시국가들이 싸우기도 하고, 야만인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전략적 거점을 효과적으로 방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경우에는 지중해와 맞다은 나일 강 하류의 삼각주와, 시나이반도로 통하는 북방 지역, 그리고 에티오피아와 접해 있는 나일강 상류 지역만 지키면 되었기 때문에, 강력한 통일 국가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상이집트 vs 하이집트


사람들이 주로 착각하는데, 상하를 구분하는 기준은 바로 나일강이지, 지구의 방위가 아니다. 이집트 북쪽에 존재하는게 하이집트고, 수단이랑 맞닿아있는 나일강 상류에 존재하는게 바로 하이집트다. 


상하 이집트는 선사 이집트 시대로 구분하는 경향이 많다. 비록 대체적으로는 왕국도 일어나고, 신분 사회도 구성되었던 시대이지만, 이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가 생각하는 고대 이집트하고는 거리가 먼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유물이 발굴되며, (가잔 문화, 타샨 문화,바다리안 문화) 대부분의 문화가 이집트 통일을 전후해서 끝나므로 고대 이집트의 역사는 대충 BC3200년경으로 잡힌다.


모두 알다시피 통일은 나르메르가 한다. 왕관을 합친 이야기까지는 알고 있을 것이다. 



 

시작은 하이집트의 데슈레트, 그리고 상이집트의 헤제트, 그리고 나르메르가 상하이집트를 통일하고 합친 왕관인 프쉔트, 그리고 파라오의 전쟁용 왕관인 케프레쉬, 마지막으로 파라오가 의식에 썼던 것으로 추정되던, 메네스란 왕관이 있다,


고왕국시대 (2700-2200) 와 제1중간기 (2200-2050)


고왕국시대는 파라오들의 강력한 왕권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무덤인 피라미드(메르)를 짓고, 스스로의 신과 결합되어 신권을 극치로 누린 시기라 볼수 있다. 특히 제 4왕조의 파라오는 제정 일치의 극치를 보였다. 


이것은 신의 대리자를 자처하였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라 볼 수 있겠다. 특히나 이집트인의 종교관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처럼 수많은 도시국가에서 신봉하던 신들을 죄다 끌어모았으며 자기네들도 각종 도시국가나 다른 이민족들의 신앙을 자기 다신교에 맞게 끌어들였다. 추후에는 신의 속성이 달라지거나 하나의 태양을 두고 라와 아몬이 경쟁하다 어느순간 아몬-라로 합쳐지고, 지방 도시의 신이었던 프타가 경제 중심지로 떠오르자 "우주의 창조자"로 모셔지는등 각자 지역의 알력에 따라서 관계가 조절되었다. 메소포타미아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이집트인들은 사후 세계를 믿었다는 점이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이 죽음을 엄숙하게 받아들였던 것과 다르게 이집트인들은 행복한 사후세계를 그리는 종교관을 가지고 있었다.


기술적으로도 이집트가 발전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집트의 나일강은 범람이 정기적이었고, 메소포타미아와 마찬가지로 범람 이후의 자신의 땅을 가려내는 것이 아주 중요했기 때문에 치수를 제는 수학과 시기를 알아내는 점성술, 태양력등이 주로 발달되었다. 이들이 쓴 10진법과 365일의 달력은 지금 현재 서양 문명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이러한 기술을 바탕으로 피라미드(메르)를 만들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언어로는 히에로글리프가 사용되었는데, 이때는 히에로글리프가 상형 문자, 표의문자에 가깝던 시기로 추정된다. 히에로글리프는 신왕국까지 주로 쓰이다가, 추후 민중문자가 변형된 콥트어에게 그 자리를 내주게 된다. 후기로 가면 히에로글리프(신성문자)를 조금 간략하게 만든 신관 문자가 암암리에 서기들을 중심으로 쓰이게 된다. 


이후 중왕국 시대와 고왕국 시대 사이기간 즉 2200년부터 2050년까지는 제 1 중간기라는 시기로서 귀족정이 발달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때에 귀족들의 분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왕국 시대(2050-1700) 와 제 2중간기 (1700-1550)


그러나, 혼란의 시기는, 11왕조에 이르러 종말을 맞고, 이집트는 다시 강경한 왕권을 구축하게 된다. 12왕조들어 왕권은 절정을 맞는데, 통일된 중왕국 시대는 테베가 중심지가 되어 이집트 문명을 이어나간다. 13왕조 후반에는 다소 상당한 변화가 일어난다. 바로 제 2 중간기의 시작인데, 이 시기에는 힉소스의 침공후 힉소스인들의 지배를 받았던 시기로, 이 시기에 외부 민족들이 많이 들어온 시대이다. 학자들 중에서는 성경의 요셉이 흘러들어온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의 후반대라고 추측하고 있다. 


힉소스 인들은 "동쪽에서 온 사람들"을 일컽는 말이다. 이 시대는 주로 세트가 주신으로 존재하였는데, 이는 가나안 지역에서 섬기던 사막의 신인 "바알" 신앙과 세트가 합쳐진 시기이기 때문이다.세트는 상이집트에서 많이 숭상하던 신이었으나 이 시대에 바알 신앙과 합쳐진 세트는 힉소스 왕조의 영향을 받아 하이집트에서도 크게 숭상된다. 




문자로서는 히에로글리프가 계속 쓰이는데, 신관문자의 좋은 예시. 이집트 제 18왕조 시절인 아멘호테프 1세 제위때(기원전 1514~1493년경) 글씨연습용 석판에 쓴 글귀로 중왕국시대의 문학작품인 <아메넴하트의 교훈>을 담고 있다. 본 텍스트는 제 12왕조의 개창자 아메넴하트 1세가 아들 센우세레트 1세에게 써준 교훈서로, 쿠데타로 전왕을 죽이고 왕이 된 아메넴하트 1세의 사정을 반영하듯 "네 주변 부하들을 항상 철저하게 감시하라. 아무도 믿지 마라. 네 형제도, 알고지내는 친구들도, 친밀한 관계를 만들지 말아라."라고 쓰여 있다. 이 시기로 가면 막 흘려쓴 문체들도 나타나게 된다.


이후 힉소스는 17왕조와 경쟁하다,  18왕조의 아흐모세 1세에게 정복되고 만다. 


신왕국 시기(1550-1100)와 종교 개혁의 시대


신왕국 시기에서의 가장 중요한건, 바로 18왕조의 아마르나 시대의 종교 개혁이다. 이는 지금까지 이어온 이집트의 신앙을 바꾸는 대 종교개혁 작업이었는데, 아마르나 시기에서는 파라오 아케나톤이 수도를 테베에서 아케나톤으로 옮기고, 종교적 권력으로 집중된 귀족의 특권을 철폐하던 동시에, 파라오의 왕권 강화를 노리던 시기기도 하다. 



아톤은 이렇게 유일신으로 묘사되며, 태양에 여러개의 손이 달린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그의 개혁은 소수의 하위집단을 제외하면 민중의 호응을 얻지 못했으며, 기존 집권층의 반발을 산다. 결국 투탕가멘 이후에 이 신앙은 뭍이게 되었고ㅡ 추후 파라오가 된 18왕조나 19왕조에 의해 철저히 말살되고 만다. 


신왕국 시기는 힉소스의 지배를 끝낸,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황금기라고 볼 수 있다. 트루모세 1세, 람세스 2세등, 우리가 알고 있는 전투형 파라오들이 이 시기에 나오기도 했다. 물론 이집트가 다른 약한 나라들 패고 다녔다는건 아니다. 주 전투로는 메깃도전투가 있겠는데, 이는 성경에서 아마겟돈의 전투로 묘사되는 전투로서 히타이트와 한번 크게 싸운 전투였다. (물론 이집트는 자기는 이겼다고 써놨는데 사료상 아무리 봐도 진거 맞다 ㅠㅠ)


그 이후 카데시 전투를 종결로, 히타이트와 이집트간, 더 나아가 세계 최초의 평화 조약이 맺어짐으로서, 히타이트와 이집트는 서로 화해하고 언제 싸웠냐는 등 친하게 지내게 된다. 물론 히타이트는 몇백년후 바다민족에 의해 쓸려나간걸로 추정되고 있다...


그 이후,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지배


그 후 제 3시기 이후에는 캄비세스에 의해 이집트가 정복되고, 추후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그리고 프롤레마이오스 왕조에게 점령되기 때문에, 고대 이집트사에서 다루지 않을 수가 있다. 


프롤레마이오스 치하에서 결국 이집트는 그리스화가 진행되었고, 문자의 사용도 그리스어의 영향을 받은 민중어인 콥트어에 의해 교체되게 된다. 제 3중간기부터 끝은 추후 그리스 문명과 함께 소개하는 것이 더 이해가 좋을 것이다. 더 재미있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