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사회/인류의 역사

앗시리아 VS 히타이트

첼린저스 2016. 9. 1. 09:00

앗시리아와 히타이트는 서로 각자의 전성기가 틀린 전투 문명(?) 이라고 볼 수 있다. 아마 세계사 시간때는 히타이트가 곧 철기라고 배웠을 것이다. 한편 앗시리아는 고대에 수메르 인의 북방에 주로 살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후 바다민족의 침입으로 히타이트와 이집트가 약해진 틈을 타 중동을 석권한 문명이다.





굳이 두 문명을 비교하는건 이집트와 그리스(미케네,크레타)를 제외한 메소포타미아의 역사 중에서 철기를 사용하였던 민족들이자, 아시아의 중심에 서서 철기를 전파하고,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교류를 담당했다는 점이다. 


히타이트의 배경 소개


히타이트는 소아시아에서 번성하다가 추후 구 바빌로니아 제국을 침공하고, 그걸 유지할 기력이 없었는지 쇠퇴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기원전 14세기 수필룰리우마 1세에 의해 부흥하여 앗시리아 및 바빌로니아와 동맹을 맺기도 했다. 자기네들 스스로는 히타이트라 부른적은 없고, 성경에서 헷 족속, 히브리어로 된 성경에서 히티 또는 히팀(복수형) 으로 부르던 것이 나중에 이 민족의 실체가 밝혀지며, "Hittites"(히타이트) 라고 불리게 되었다.


하나 우스운건 다른 민족들은 오늘날 우리가 히타이트라고 부르는 민족을 하티(Hati)인, 즉 히타이트인이라고 불렀지만 정작 히타이트인들 스스로는 그들이 소아시아로 들어오기 전에 그 땅에서 살았던 민족이나 그들의 언어를 하티라고 지칭했다는 점이다. 자기네들은 자기 언어를 나술리, 또는 네쉴리라고 불렀는데 이는 네샤라는 도시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다. 네샤의 또 다른 이름은 카데쉬인데, 카데쉬가 자신들의 예전 중심지였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종교


앗시리아는 수메르 다신교를 믿었다고 알려져 있다. 반면 히타이트는 정복지의 신들을 자신의 신전에 옮겨오는 방식으로 신을 숭배하였다. 덕분에 문화적으로 히타이트는 바빌로니아와 유사했다고 알려져 있다. 


앗시리아의 언어생활 vs 히타이트의 언어 생활


앗시리아는 기존과 마찬가지로, 언어는 종교적으로는 수메르어를 사용하고 일상적으로는 아카드어를 사용하였으며, 반면 히타이트는 자신들이 쓰던 인도 유럽어족의 언어 이외에, 궁정과 서기관들은 아카드어를 사용하고, 민중들과 소통할때는 일반 상형문자 또는 구 피정복민들의 언어인 하티어등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위에서 정복지의 신들을 자신의 신전에 옮겨왔다고 하는데, 이 과정에서 수메르어와 루비어를 비롯한 8가지의 언어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특히 문학과 예술은 피정복민들의 것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철기와 군사력


비록 히타이트인들이 철을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풀무가 없었기 때문에, 자연의 바람을 이용하였다. 하투사 부근은 일정 시기에 강한 바람이 불어오는데, 그 시기에 풀무와 용광로를 설치하고 철을 생산한 것이다. 덕분에 히타이트의 주신은 바람 속성을 가지고 잇으며, 철기는 신의 은총이 들어간 무언가로 취급되었다고 한다. 히타이트 군대의 중심축은 철을 중심으로한 마차였다. 전차에 탄 전사들은 주로 철을 이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말은 가죽을 씌운 목재를 주 방어구로 사용하였다. 철이 그만큼 숭상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제국이 망하기 전까지 수도인 하투사를 버릴 수 없었다. 


한편 아시리아는 풀무를 이용하여 양질의 철을 생산할 수 있었으므로 본격적인 철기시대를 열게 되는 초석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앗시리아의 특징은 바로 기병인데, 앗시리아는 말의 품종을 개선하고 전차를 개량하고, 기마술을 고안하여 체계적인 기병을 운용했다는 것이다.단 아시리아가 정말로 기마술을 직접 고안한 것인지 아니면 유목민족이 고안한 기술을 도입한 것인지는 논란이 있다. 다만 적어도 아시리아가 싸운 적들 중에 스키타이를 제외하면 아시리아 정도로 기병을 운용한 나라가 없는 것은 거의 확실한 것 같다. 


전차로 들어가보면, 아시리아 이전에는 말의 허리 부분이 아닌 엉덩이 부분에 타야 했기 때문에 말을 통제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시리아의 미술품 중에도 기병은 말을 통제하지 못하고 대신 다른 말에 탄 마부 한 명이 자신의 말과 기병의 말 두 마리의 고삐를 동시에 쥐고 있는 모습이 발견되어 기마술이 발전하는 과도기적인 형태를 보여주기도 한다.


아시리아는 히타이트와 다르게 여러번 수도를 옮겼다. 건국시의 첫 수도는 나라 이름과 같이 앗수르였으나, 기원전 13세기에 황제의 이름을 딴 도시 투쿨티-닌우르타로 천도한 뒤 다시 님루드, 코르사바드를 거쳐 멸망할 때의 수도는 니네베였다.


잔혹한 문명과 관대한 문명


히타이트는 주로 여러 언어를 사용하고, 피정복민들에게 관대한 종교정책과, 언어정책, 법률정책을 시행한 것으로 보인다. 히타이트의 법률은 이보다 훨씬 진보적이었다. 우선 법률조항 자체도 이전이나 동시대에 존재했던 다른 문명과 달리 매우 너그러운 편이었으며, 민법적인 문제를 형법적인 문제와 구별하여 민법적인 문제에는 체벌보다는 배상을 규정하고, 형법적인 문제에서는 고의와 과실을 구별하는 등 고대와 중세는 물론 근대 초기까지도 달성하지 못한 개념에 도달했다


다만 앗시리아는 피정복민들에게 전혀 자비롭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다. 오죽하면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를 비롯한 피정복민들이 바로 반란궁리를 할 정도로 말이다. 그들이 스스로 자랑스럽게 써놨듯이 저항한 지역은 사람들의 씨를 말려 해골탑을 쌓고, 항복한 지역도 군주와 귀족들은 짐승처럼 코에 구멍을 뚫고 쇠사슬로 엮어 끌고 가 처형하고, 평민들도 먼 곳으로 강제 이주를 시키고 -거추장스러운 아이들은 바위에 머리를 박아 죽였다. 성경에서는 앗수르라고 나오는데, 분노에 섞인 서술을 하고, 북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켰으며, 이후 이 이스라엘의 열 지파들은 사마리아인이 된다. 이스라엘뿐만이 아니라 앗시리아는 피정복민들을 잔혹하게 다룬 후 외딴 곳으로 끌고가서 기반을 없애는 식으로 피정복민을 다루었다. 


다만 관대했던 잔혹했던 멸망은 참혹했다. 히타이트는 바다민족의 침입 또는 어떤 이유로 갑자기 역사에서 증발해 버렸고 (추후 발견된 흙판은 노릇노릇 구워져 있었다는 점에서 필히 잔혹했을 것이다 -) 앗시리아는  메디아, 바빌로니아, 스키타이, 킴메르 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추후 잔당들이 저항을 계속했으나 그것은 신 바빌로니아 제국에게 타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