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와 담론/종교(Religion)

가난 속에서의 교회, 풍요 속에서의 교회

첼린저스 2016. 7. 7. 18:20



본인은 조용기 목사를 상당히 좋아하지는 않는다. 이 블로그를 방문하시는 분들도, 조용기 목사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물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생각) 다만 본인의 경우, 조용기 목사와 얽힌 인연이 있다. 


할머니께서 말씀하시기를, 할머니가 젊었을 적에 너무나 삶이 힘들어 차도에 뛰어들어서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으셨다고 한다. 그런데 조용기 목사님이 이걸 구해주시고 당시 돈으로 1만 5천원을 말없이 쥐어주며, 배가 고프거나 추우면 언제든지 오라고 했다고 한다. 


그걸로 삶의 희망을 얻은 우리 할머니는 그걸로 작은 사업을 시작해서 지금은 노후 자금도 충분하고, 부족할 것 없는 생활을 하시고 있다. 할머니는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죽는 상황에 몰려도 하나님을 의지하면 살아날 수 있다고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가난한 자의 교회


"무겁고 짐진 자여 모두 내게로 오라"


진중권 같은 사람은 “기독교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이미 혁명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뉘앙스로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실제로 노인층 중에, 기독교 신자가 많은 것은 너무나 절박한 현실 속에 잡을 것이라고는 기독교 밖에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교회가 근대화에 기여하고, 일제강점기와 서슬 퍼런 독재 치하에서 사람들을 꿋꿋이 교육시키고, 그리고 정말 어려운 사람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주었던 공을 절대 펌하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부분에서 조용기 목사와 같은 얕은 신학을 가진 사람이라도, 사람을 고치고, 배고픈 자에게 빵을 주었고, 가르침을 주었다. 이 공로를 절대 펌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개신교는 대한민국의 역사하고도 분리될 수 없다. 대한민국을 이끈 1공화국의 구성원들은 개신교인이 상당히 많았고, 개신교를 통해 자유주의 사상이 주로 전파되었다. 유명한 정치인들이 장로이거나 기독교인인 이유도 그런 이유이다 (대표적인 예로, 한국의 모 대통령..)


교회가 어디 신학의 전유물인가. 베드로는 어부였고,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억압받던 자였다. 심지어 출애굽기에서 모세를 따르던 자들도 애굽에서 핍박받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위해 기도했으며, 그들의 열망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정착하여 세운 이스라엘의 유대교는 어떠한 위기가 닥쳤는가? 바로 영적 위기가 닥친다.  



풍요로운 시절의 교회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교회"


우리는 이러한 기독교의 사회적 공헌과, 근대화에 끼친 정신적 영향을 듣는다. 그러나 지금 그것은 옛날이야기일 뿐이다. 지금의 기독교는 사회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아무리 살기가 퍽퍽해도 옛날처럼 굶지는 않는 사회가 되었다. 오늘날의 교회는 통성기도를 하며 1907년의 평양대부흥을 꿈꾸지만 그 당시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이 새롭게 들리던 시대, 먹혀 들어가던 시대였다. 그러나 요즘 예수천국 


그리고 그때는 꺼져가는 민족을 바로잡고, 개화하고자 하는 열망의 젊은이들이 교회에 들어왓지만, 요즘 부흥회들은 물질적 부흥만을 원하는 것 같다. 그런 간절함이 사라졌다. 


그만큼 물질적으로 쪼들리지도 않고, 교회의 가르침이 새롭지도 않은 사회가 되었다. 이곳에서 사실 "우리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너희는 배불러서 믿음을 모르는거야" 같은 꼰대질을 한다. 교회는 점점 기성 세대의 대표자가 되어가고 젊은이들은 정말 광신적인 부류만 빼고 교회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기성 세대의 대표자가 된 교회는 기성 세대에 수준의 설교를 하고, 젊은이들은 헝그리 정신과 이상한 소리로 가득찬 교회에서 발을 빼고 만다. 


이러한 풍요로운 시절에서 교회는 어떻게 헝그리 정신을 버리고, 사회에 두각을 들어낼 수 있을지 진심으로 고민해 보아야 한다. 교회의 지적 수준과 교육들이 새롭지도 않고, 수준이 낮다. 동성연애 이슈와, 창조과학들이 지금들어 더욱 강조되는 이유도, 교회가 자유주의와 새로운 사상의 선봉장의 역할이 사라지고, 사회에 역행하는 기능만이 남겨진 교회가 교육받고, 삶의 질이 향상된 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과연 교회의 성장 하락이 믿음이 부족해서거나, 청년들이 배가 따스해서일까? 우리는 풍요로운 시절에서의 교회를 생각해 본적이 있는지, 우리가 이 풍요속의 빈곤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해본적이 있는가?


지금은 성도가 정말 무섭다고 한다. 성도들의 교육 수준이 교회 목사보다 더욱 높다. 신학교들의 수준은 점점 형편없어지는 반면에, 일반 대학들의 위상은 하늘 높은줄 모르고 솟아오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자살율은 늘고 삶의 행복이 줄어든다. 마음이 가난하지만 교회는 안 간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교회에서 자신들의 영적 빈곤을 매꿔준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풍요 속에서의 교회를 고찰해야 한다.


물론 조용기 목사가 우리 할머니를 살려주지 않았다면, 나는 이 세상에 없었을수도 있다. 이 부분에서는 정말 깊이 감사를 표한다. 그러나, 조용기 목사를 비롯한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한 교회는 풍요 속에서의 배고픔이요, 평화 속에서의 칼에 불과하다. 나는 당당하게 그의 방식이 시대착오적이고. 이제는 한물간 방식이라고 보여진다. 


만약 풍요롭고, 교회를 보는 눈과 비판하는 눈이 날카로워지는 사회에서 교회가 동떨어진 정신을 강조하며,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비웃음만 당한다면, 그것이 어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어둠 속에서 저항을 하는 교회가 어둠한테 비아냥이나 당하면 말이 되겠는가 말이다. 소금기를 유지해야 한다.


차가운 해풍에서도 소금기를, 뜨거운 태양볕에서도 소금기를 유지해야 한다. 우리는 풍요 속에서의 교회를 진지하게 고민해본적이 없다. 현대 사회에서 교회가 처한 이슈들을 다시한번 새겨보고 반격을 가하고, 지식을 사랑하고 지원해주고, 단순한 부흥보다는 진정으로 인류애에 기반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지원하고 교육시키고, 소수자들을 포용하고, 단순히 먹고사니즘에 치중하기 보단 풍요를 기반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더욱 가깝게 다가갈 방법을 찾는것이 먼저 아닐까.